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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ng/되새김

임진왜란과 징비록 그리고 당시 조선의 상황

by 그냥그렇듯이 2016.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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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징비록-

'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한 전쟁을 일컫는다. 이 전쟁은 1598년(선조31년)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시 영의정이였던 류성룡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속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살피며 잘못된 관행과 병폐를 고치기위한 충언을 선조에게 쏟아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으나 1598년 명나라 장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왜(倭)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고만다.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징비록 집필에 몰두하였다. 1600년에 복권되어 선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당시 조선의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간 창업을 주도 했던 개국 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되자 그 부패가 극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 재정립을 강조하면서 전반적인 국가 통치질서를 재정립하려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 훈구파 세력은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두 세력의 대립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고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여 더욱 불거졌다. 그 결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크게 타격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고 사림도 내홍 탓에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모후 문정왕후의 대리 정치 탓에 외척 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권력이 개편되면서 부패가 극심하였다.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였으며, 때문에 국정에 들인 노력보다 얻는 결과가 매우 적었다. 
-위키백과 '임진왜란' 참조-

-징비록에 대한 어이없는 이야기-

징비록은 분명 류성룡이 그의 고향인 안동에서 썼다. 하지만 이 글은 조선에서 별로 일컬어지지 않고 일본으로 넘어가 일본인들이 번역을 하고 왜란때의 역사적 고증을 모두 포함한 일본판 "조선징비록"이 출간된다. 조선은 이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통신사를 통해서 '징비록'의 존재를 알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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