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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ng/보고 남김

다빈치 얼라이브: 천재의 공간

by 그냥그렇듯이 201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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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생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르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만능인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음악·회화 외에 모든 학문에 있어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그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 인정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또는 1482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1506년 밀라노에서 프랑스 왕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1516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1516년 프랑소와 1세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Clos Lucé)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여기서 <성 안나>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 설계하였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랑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용산전쟁기념관에서 다빈치 얼라이브 천재의 공간 전시를 관람했다. 보통 전시회를 보러가기전에 작가의 신상과 작품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러 가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첨단에 서있었던 지성인답게 워낙 다뤘던 분야가 많아 오디오북을 대여했다. 오디오북 대여 가격은 3,000원이며, 꼭 대여하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전시회에는 레오나르도가 역량을 펼쳤던 다양한 분야의 시제품들의 복원 및 복제품이 즐비하다. 이 작품들은 다빈치가 남긴 수 만장의 노트를 철저히 고증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시내용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도시계획과 설비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이였다. 

아래 전시 사진과 주석 참조.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엄청난 메모광이였다. 모든 순간 순간에 자기가 관찰한 대상에 대해 기록하며 연구했다.

이 노트들은 코덱스(Codex)로 묶여있으며 각각의 코덱스마다 다루는 주제가 다르다.

코덱스는 전 세계의 박물관에서 보관중인데, 이 중 한권은 빌게이츠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 http://superich.heraldcorp.com/view.php?ud=20140225001265&sec=01-74-01

 

이상하고 쭈글거리는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이 언어는 정규교육을 받지못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개발한 자신만의 언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언어를 사용해 모든 코덱스를 기록했다. 이 글자는 일반적인 글 쓰기와는 다르게 오른쪽 하단부분부터 왼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왼쪽 상단부분에서 글이 끝나게 된다.

<현대의 낙하산을 닮은 기구>

<현대의 헬리콥터를 닮은 기구>

 

 

해부학에 대한 조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시대에는 인체해부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수 많은 인체 해부를 통해 그 지식을 탐구하고 기록하였다.

<다빈치가 세운 도시 계획>

<모나리자>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

<마지막 만찬>

최후의 만찬(最後의 晚餐, 이탈리아어: Ultima Cena, 영어: The Last Supper)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마지막 날의 최후의 만찬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420 x 910cm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제작에 착수하여, 1498년에 완성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몇 안되는 완성된 작품의 하나이지만,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그리는 기간동안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그들이 느낀 '공포', '고뇌', '초연' 등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애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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