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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통찰 15: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이해 - 과학 공부와 인문학 공부

by 그냥그렇듯이 2016.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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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

장회익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루이지애나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박사)

김인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이해는 가능한가? 인간과 자연 모든 것을 통합해서 논의할 수 있을까?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 자연과학

인류의 모든 사상의 기초를 탐구하는 학문, 인문학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이해를 위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김) 자연과 인간의 통합적 이해를 생각해보면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가 쓴 서시(The Prelude)가 떠오른다. 이 시의 앞부분에 보면 흑인아이가 뛰어간다. 이 소년은 한 손에는 조개껍질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이 소년은 지금 세상을 멸망시킬 홍수가 오는데, 인류의 보물 두 개를 묻으러 가는 중이다. 책은 유클리드 기하학 원본이고 조개껍질에는 인류의 미래를 예언한 시가 들어있다. 워즈워스는 '시와 수학'이 인류의 영원한 재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문학과 과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일상언어를 사용하느냐? 수학을 사용하느냐?라는 점이 있을 것 같다. 크게 변하지 않는 언어와는 달리 수학은 변화의 폭이 크다. 때문에 인문학과 과학의 통합을 방해하는 것은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실재가 있고 그 아래에 존재하는 수단이 언어와 수학이다. 실재는 그리스어로 아페이론 (Apeiron)이라하며 규정할 수 없는 본질적 존재를 지칭한다. 실재는 모든 것의 연속이며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수학도 실재를 설명하는 방법이지 그 자체가 실재 자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곧 '실재는 무한하고 언어와 수학은 유한하다.'라는 전제를 가진다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합적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겸손'이 필요하다고 본다.

장) 언어와 수학 없이는 이해와 소통이 어렵다. 이는 분명한 한계점이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이렇게 언어와 도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학문적 발전을 이뤄왔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학문의 성과를 향유하는 능력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니 삶에서 중요한 핵심을 이해하고 이를 알리는 점이 중요하다. 인문학의 지혜와 과학적 사실을 결합할 수 있어야한다.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상생하는 과정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김) 찰스 퍼시 스노(Charles Percy Snow, 1905-1980)은 영국의 소설가, 물리학자, 정치가이다. 그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한 논문 [두 문화와 과학 혁명]에서 과학주의를 제창해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스노는 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Thirty years ago the cultures had long ceased to speak to each other: but at least they managed a kind of frozen smile across the gulf."

"30년 전에는 과학자와 철학자가 만나면, 서로 불편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인사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마주 보면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스노는 과학자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인문학자는 과거만을 말한다고 한탄하며 영국과 서구의 문화가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문화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는 철학, 사회학, 미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구 활동을 하였다. 체계성을 거부하고 근대 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했다. 아도르노는 [수필의 형식(Der Essay als Form)]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1958년에 발행된 문학 노트 (Noten zur Literatur)에 실려있다. 이 글은 아도르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심을 담았다. 이 글의 첫 글귀에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에세이는 근대 초기에 데카르트가 확립한 네 개의 규칙에 대한 항의이다."

데카르트는 서양 철학사의 큰 전환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틴어로는 Cogito ergo sum이다. 이것은 인류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안에 기재된 내용으로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인식을 제거하고 확실한 인식만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에 대해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의심)를 통해서 '일생에 한번은 자신의 모든 문제에 대해 철저한 의심'을 해봐야한다고 주장한다.

17세기 유럽은 중세의 세계관이 무너지면 심각한 사상적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사상적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체계적 의심의 네 가지 규칙을 고안해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The first was never to accept anything as true if I didn't have evident knowledge of its truth. (참이라고 인식한 것외에는 어떤 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2. The second was to divide each of the difficulties I examined into as many parts as possible and as might be required in order to resolve them better.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문제를 작은 조각들로 나눌 것.)

3. The third was to direct my thoughts in an orderly manner, by starting with the simplest and most easily known objects in order to move up gradually...to knowledge of the most complex, and by stipulating some order even among objects that have no natural order of precedence. (내 생각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하며 가장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복잡한 것으로 나아갈 것.)

4. And the last was to make all my enumerations so complete, and my reviews so comprehensive, that I could be sure that I hadn't overlooked anything.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검사를 행할 것.)

데카르트는 이 네가지 규칙을 통해서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규칙이 가장 잘 적용된 예는 바로 '일반 수학'이다. 수학은 현대의 보편적 언어이다. 일반 수학의 핵심은 '세 개의 삼각형'이다. 첫번째 삼각형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이다.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현상학파를 창설하였다. 그는 존재로부터도, 개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주관으로부터도 분리된 '순수 의식'의 탐구를 실시하여 현상학을 제창하였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인류가 멸망하여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성립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인간의 사고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바뀌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두번째 삼각형은 '삼각함수를 나타내는 삼각형'이다. 삼각함수를 통해서 현상과 본질이 다를 수 있다는 이해가 일어난다. 

sin(A+B) = sinA x cosB + cosA x sinB

미분의 기본 개념을 통해서는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미분의 개념이 활발히 적용된 분야는 바로 경제이다. 미분이란 결국 현재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규칙을 활용하면 미분을 더욱 더 손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도르는 에세이 형식은 데카르트의 네 가지 규칙에 대해서 반대되는 경우라고 이야기했다. 아도르의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에세이는 확실하고 분명한 인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 과학은 실험의 체계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인문학에선 체계와 정량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는 '맥락'을 짚는 능력이 요구된다. 책은 측면의 독서를 이뤄내야 한다. 이를통해서 책 사이의 맥락을 묶어내야하며 그것이 인문학 공부이다.

2. 에세이는 분할을 요구하지 않고 전체를 가정하지 않는다. - 인간의 역사는 전체를 알 수 없다. 인간은 역사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한속에서 무한을 추구한다.

3. 에세이는 단순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 인문학에는 분명한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은 선례의 결과물을 보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분명함'과 이 '분명함'들 사이의 맥락이 '확실함'이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결단'이 필요하다. '위기와 동요라는 건 정상적인 역사 과정의 일부이다. (게오르크 헤겔)'

4. 에세이는 누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모든 역사를 다 안다. 모든 소설을 다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인문학에서는 정보 누락이 불가피하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1988년 [존재와 사건]을 출판해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정치적 전망을 펼쳤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새로운 '진리 철학'을 확립했다. 그는 [존재와 사건]에서 철학이 진리의 탄생과는 무관하며 진리가 오직 사랑과 예술, 정치, 과학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책을 진리의 용기로 숭배하는 권위주의', '책을 정보의 창고로 이용하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기초주의라고 생각한다. 

즉,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에서 가장 요한 것은 기초주의이다.

아도르노는 [수필의 형식(Der Essay als Form)]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에세이스트는 실험하며 글을 쓰는 사람, 

대상을 여기저기 조사하고 물어보고 모색하고 시험하고 순간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 

다각도에서 대상에 몰두하며, 자기가 본 것을 마음의 눈에 집중하는 사람, 

글을 쓰면서 생겨난 여러 조건이 제시하는 새로운 내용을 그때그때 음미하고 이용하는 사람이다."

아도르는 또한 "과학은 수학으로 환원한다. 그러나 에세이는 침잠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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