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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통찰 06: 알파벳과 문명

by 그냥그렇듯이 2016.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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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통찰 6: 알파벳과 문명

출연자: 

배철현 교수(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김개천 교수 (국민대학교 공간디자인학과 교수)

문자는 지배층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알파벳의 등장으로 인해서 문자는 의사 소통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알파벳 문자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해서 알아본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기원전 3300년경 문자가 등장하면서 소통이 시작이 되었으며, 그전에는 말, 이야기로 전해지던 구전들이 기록되고 널리 퍼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는 구전 신화의 아주 대표적인 예이다.그렇다면 특권층만이 사용했던 문자가 어떻게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그 원인은 알파벳의 탄생에 있다. 알파벳은 기원전 18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 알파벳이라는 문자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는 서구 문명의 두 중심인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등장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 파악해보자!

헬레니즘 <https://ko.wikipedia.org/wiki/%ED%97%AC%EB%A0%88%EB%8B%88%EC%A6%98_%EC%8B%9C%EB%8C%80%EC%9D%98_%EA%B7%B8%EB%A6%AC%EC%8A%A4>

헤브라이즘 

<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B%B8%8C%EB%9D%BC%EC%9D%B4%EC%A6%98>

기원전 12세기 무렵, 오리엔트 국가들은 몰락을 겪는다. 청동기를 개발한 나라들이 하나둘 씩 몰락해간다. 이 오리엔트 문명의 몰락 중에 트로이 전쟁, 이집트 신왕조 멸망, 쐐기문자의 몰락이 일어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대이동하게된다.기원전 19세기에는 고대 근동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쐐기문자로 표현하면 apiru라고 하였으며, 성경에서는 이들을 히브리인(Hebrew)라고 했다.히브리인은 민족적인 개념이 아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은 '아바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아바르'는 국경을 넘어간다 라는 뜻이다. 고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유월절은 이 국경을 넘어다니는 것을 기리는 날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상기하면 된다.

기원전 1850년에 쓰인 와디엘홀(Wadi el-Hol) 에서 발견된 문자. 와디엘홀 문자는 최초의 알파벳 체계이다.

알파벳 체계는 소리나 형태에 기반하는 문자가 아닌 제한된 문자들로 모든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체계적인 문자 체계이다. 이러한 알파벳이 등장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읽고 듣는 모든 고전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파벳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와디엘홀의 알파벳을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은 사람 머리를 나타낸다. 이는 Rosh로 읽었는데 이 단어의 앞글자 R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왼쪽에 있는 것은 집을 나타낸다. 이는 Beit라고 읽었는데 이 단어의 앞글자 B를 표현한다. 그래서  R+B를 합친 것은 rab = 대장을 뜻했다. 유대인의 '랍비'가 그 예이다.

그 왼쪽에 있는 것은 문을 나타낸다. 이는 dalet라고 읽었으며 이 단어의 앞글자 D를 표현한다.

그 다음 왼쪽에 있는 것은 뱀을 나타낸다. 이는 nahash라고 읽었으며 이 단어의 앞글자 N를 표현한다. 이게 2개가 이어져있다. 고로 D+N+N = dannu라는 뜻이다. dannu는 강력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로 Rab + Dannu 는 강력한 통치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혁명이다. 이집트의 문자는 650개 (아카드의 쐐기문자) 였기 때문에 문해율은 0.001%였다. 하지만 와디엘홀의 알파벳을 쓴 사람들은 노예들이였다. 고로 노예들이 쓴 문자를 Alphabet이라고 한다.

세라빗 엘 카뎀(Serabit el-Khadim): 기원전 1550여년전 만들어진 유물이다. 고고학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플린더스 페트리 경이 시나이 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이집트 하소르 여신을 위한 신전에서 발견했다. 하소르는 암소 여신이였다. 이곳은 '터키석'이 아주 많이 매장되어 있었는데, 이집트인들은 외국의 노예(히브리인)들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이 터키석을 채굴시켰다.

이 세라빗 엘 카뎀 하단 부분에 보면, 알파벳이 새겨져있는데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 모양이 뜻하는 것의 앞글자만 따서 알파벳을 새긴것이다. 이를 합치면 l-ba'alat: 여자 주인을 위하여 라는 뜻이 나온다. 인간이 26개의 문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알파벳은 지금까지  페니키아인들이 상업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배철현 교수의 주장(알파벳은 기원전 19세기 히브리인들이 (노예들이) 생존을 위해서 만들어졌다)은 무슨 뜻인가?

배철현 교수 이야기:

페니키아(해상무역상)인들이 문자를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헤르도토스와 호메루스가 서양 문자의 근원을 페니키아인들이 가져왔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있다. 페니키아인들이 무역을 하러 여러곳을 돌아왔는데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페니키아 문자를 활용해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의 나온 알파벳은 학계에서는 떠돌이가 만든 글자 (Proto-Sinaitic script)라고 한다. 이 문자는 어떤 집단이 아니라 떠돌이(노예)들이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문자는 보통 지배계급이 통치를 위해서 만드는데 알파벳은 밑떠돌이(노예)들이 만든 계급이다. 어찌보면 알파벳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었을수도 있을 것 같다.

저 히브리어 알파벳은 너무 쉬워서 어린이들도 하루면 배울 수 있다. 때문에 글을 읽는 힘을 바탕으로 피지배계급의 사람들이 권력을 가질 수 있게되었고, 이 알파벳의 등장은 상업계급의 등장과도 맞물려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계급의 등장은 상업 국가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인류의 문명 발달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인류의 문명은 주류 문명이 비주류로, 비주류문명이 주류 문명으로 뒤바뀌며 발전해왔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맞다. 노예, 떠돌이 계급 (히브리)가 쓰던 용어가 주류로 쓰인점이 그와 비슷하다. 이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 모세를 언급한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와 싸우고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뤘다.성경엔 Exodus(출애굽기) 부터 Deuteronomy(신명기)까지 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세 <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C%84%B8>

모세는 극적으로 이집트의왕자가 되지만 자신의 히브리 출생을 잊지않았다. 그리고 노예 히브리인들의 삶을 보고서 분노를 느껴 이집트인을 죽이고 사막(경계)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그곳에서 40년동안 지내게 된다. 그리고 모세는 40년 간의 사막 생활 후 지도자로 거듭나게 된다. 

출애굽기 3장 :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네가 서 있는 곳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나는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모세는 사막에서 지내면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목자로 산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성서에 나온 모세가 광야를 지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다. 모세는 자신에 대한 성찰 (광야)를 지나 더 깊숙한 곳, 하나님의 산으로 들어간다. 무려 40년동안의 수련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는 불이 붙은 나무가 있었는데 모세는 그 곳에서 엘리야가 들은 침묵의 소리와 같은 것을 듣는다. 

모세의 첫 번째 깨달음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이다. 이는 내가 서 있는 곳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통찰의 첫번째 깨달음은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서 상식적인 공간을 거룩한 공간으로 보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모세는 이곳에서 무하마드가 들은 침묵의 목소리의 명령대로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는다. 옛날에 신발은 계급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유일신'의 개념이 생겨나게 됐다. 유일신은 자신의 신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신이냐?'라는 개념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인간의 고통을 아는 것'이 바로 유일한 신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인간의 행복과 슬픔 그리고 특별히 고통을 아는 어떤 존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한다. 모세는 이에 신에게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신은 "나는 나다."라고 이야기한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나는 곧 나다.

<출애굽기 3장 13-14절>

I am who I am

ego sum qui sum.(라틴어)

ego eimi ho on. (그리스어)

ehyeh asher ehyeh. (히브리어)


김개천 교수 이야기:

유일신의 등장에 대해서 묻는다. 실제 유일신은 이집트에서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유일신이 등장한다고 하면 두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집트 유일신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배철현 교수 이야기:

기원전 1350년에 이집트엔 아크나론(Akhnaton)이라는 왕이 있었다. 

아크나론(Akhnaton): 정식 명칭은 아멘호테프 4세이다. 이집트 제 18왕조의 제 10대 파라오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유일신 아톤을 신봉하고 종교 개혁을 이뤄냈다.

아크나론은 이집트의 다신 문화를 없애고 태양이라는 유일신을 섬기자는 혁명을 일으킨다. 이는 분명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잉태한 사건은 맞지만 혁명은 실패하게된다. 혁명의 실패이유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몇몇 왕족의 통치를 위한 focus가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모세가 보여준 유일신 사상은 알파벳 체계와 함께 길을 걷는다. 성서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희박하지만) 이 성서의 작가(히브리 작가)가 의도한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나라는 존재로 설명이 가능할 때 그것이 바로 신적인 사람이다.'

'신은 다른 사람 혹은 절대자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이 될 때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는 신적인 존재의 새로운 정립으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다.이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서양에서 두 갈래로 발전되게 된다. 하나는 창세기 22장,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친 것처럼 히브리 문학. 또 하나는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는 사건, 즉 그리스 문학으로 나뉘게 된다.

히브리 문학은 시적이고 중요한 것일수록 함축적이다. 고로 히브리문학을 침묵속의 웅변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스 문화는 지속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이야기한다.히브리 문학은 독자가 사건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만들고, 그리스 문학은 독자들에게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한다. 

히브리 문학은 등장인물의 감성과 생각이 단편적인 대화로 암시되어 있지만, 그리스 문학은 격정적인 자신의 속 마음을 질서있게 풀어낸다.

아리스토텔리스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한 사색이 인간 삶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문학 작품 중에 최고는 비극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비극'(Tragedy)의 어원은 그리스어 Tragodia에서 왔다. Tragodia는 염소 새끼라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아테네의 축제에서 1등을 한 사람은 염소새끼를 준것에서 유래했다. 

비극(Tragodia)는 praxis(경계를 왔다갔다하는 과정/연습)을 재현/흉내(mimesis)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praxis(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연습)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리스의 <시학>은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1) 거침없이 단호한 것 (spoudaios) : 오랜 통찰의 결과로 단호할 수 있는 말과 행동 (무모함이 아니다.)

2)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완벽한 것(teleios) : 수단이 목적이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는 완벽한 상태

3) 압도적인 것(megethos)

이 세 가지를 갖추게 되면 이를 갖춘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그 영웅에게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저런 비극적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심이 일어나게 된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단호하고, 완벽하고, 압도적인 것이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신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까?

배철현 교수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세계관이 이 세상에 구현될 수 있다고 믿은 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incarnation, 인간이지만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는 신적이면서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일치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 세가지를 갖추면 일단 사람들이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두번째는 이런 공포심에서 발생한 자기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두가지를 거친 사람들은 자신이 정화가 된다. 바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다. 

기원전 472년에 최초의 비극 작품이 초연되었다. 바로 '페르시아인들' 이다. 

페르시아인들: 기원전 472년 최초로 공연된 비극 작품이다.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인 아이스킬로스가 살라미스 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E%98%EB%A5%B4%EC%8B%9C%EC%95%84%EC%9D%B8%EB%93%A4>

살라미스해전: 기원전 480년에 살라미스 해협에서 그리스 연합해군과 페르시아 해군 사이에 일어난 해전이다. 11시간의 해전 끝에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4%EB%9D%BC%EB%AF%B8%EC%8A%A4_%ED%95%B4%EC%A0%84>

이 작품(페르시아인들)에는 그리스인들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 이 작품은 페르시아인의 시각으로 전쟁의 참상을 그려냈다. 이 연극에서는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 1세가 등장해 "페르시아가 질 수 밖에 없었던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Hubris: 오만 : 자기가 누리고 있는 현재를 자신의 힘으로 해냈다는 착각->비극적 인간/비극적 사회의 첫 번째 요소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

Ate: 장님성 :  다가오는 위험을 모르는 것

Nemesis: 복수를 당함 = 자업자득

작품 중에서 페르시아의 대장 크세르크세스(그리스인들에게는 원수였음. 그리고 이 연극은 그리스인들 앞에서 연기되었음)는 위의 원인을 이약하며 절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크세르크세스의 절규를 본 그리스인들은 울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자아 = '그리스인' = '우리의 원수는 페르시아인'이 흩어지고 페르시아인들의 마음을 공유하게 된다. 고로, 페르시아인과 그리스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가되는 것을 theatron이라고 한다. theatron은 영화관 theater의 어원이며 이는 '자신을 제 3의 눈으로 보다.' , '자신을 원수의 눈으로 보다.' 라는 뜻을 품고 있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여기서 제 3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종교에서 쓰려던방식이 아니였나요?

배철현 교수 이야기:

맞습니다. 종교에서는 이를 신의 눈에서 본다고 표현했고 그리스에서는 동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눈으로, 원수의 눈으로 보려는 그런 시선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연극을 본 그리스인 2만명이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것이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그 당시 그리인 2만명은 거의 모든 아테네성인 남자를 합친것과 비슷한 숫자이다. ->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본 것이다. 또한, 연극은 종교적 제식과 관련이 깊다. 그리스의 극장은 꼭 신전옆에 있다. 그리스 인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연극을 봤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해서 합창과 노래를 불렀다. 마치 교회에서 박수치고 찬송가 부르고 하는 것처럼. => 이는 인류 종교의 진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님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이때 페리클레스가 크세르크세스(성경에서는 아수르)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정화되고 있는 그리스 시민을 보고 "이것이 그리스다."라고 이야기했다. 선진국이란 무기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문화가 될 때 선진사회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려와 양보는 선진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근간이며 이를 통해서만 (통과의례)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이를 '자비(慈悲)'라고 저번 시간에 이야기했다. 

고로 이 공간 (극장)은 자신만의 동굴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동굴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성숙함이 바로 '자비(慈悲)'다. 

배철현 교수는 소록도에서 40년간 봉사를 하고 홀연히 떠난 오스트리아의 두 수녀의 이야기로 강의를 끝마친다.

소록도의 두 수녀 이야기 , <http://sangto3.tistory.com/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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