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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ng/보고 남김

EBS 통찰 05: 인류이야기의 시작 길가메시 서사시 (1)

by 그냥그렇듯이 201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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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a/British_Museum_Flood_Tablet.jpg>

EBS 통찰 05: 인류이야기의 시작 길가메시 서사시 

지나간 과거에서 지혜를 얻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온 고대인들…

인류의 문명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도구, 문자, 그리고 종교…

인류는 어떻게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었으며, 어떠한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낼 수 있었는가?

출연자: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김개천 교수(국민대학교 공간디자인학과 교수)

배철현 교수 이야기:

통찰의 통(洞)자는 우리를 꿰뚫는 것이며, 심연의 공간에서 느끼는 삶에 대한 시선임을 다시금 언급한다. 또한 통찰 제 3,4편에서 다룬 인간이 가진 동물과 다른 특징들 그리고 이를 활용해 예술과 종교를 만들어낸 과정 마지막으로 묵상의 중요성을 다시금 언급한다. 결국 문명의 탄생에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묵상’이다.이번시간의 주제는 ‘인간은 어떻게 오늘과 같은 문명을 이뤘는가?’ 이다. 그리하여 문명의 순간 속에 만들어진 무형의 건물은 바로 이야기(story)이다. 모든 이야기와 신화의 어머니격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을 통해서 어떠한 인간, 영웅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지, 길가메시라는 영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 주제인 인간이 어떻게 도시를 짓고, 신화란 이야기를 만드는지 다루려고하는데 금일 주제에 대해서 김개천 교수는 어떠한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지 묻는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사실 우리는 인류의 발생 기원에 대한 논의를 간과해왔다. 또한, 동서양의 피상적인 이해(동양은 내용적이다. 서양은 형태 중심적이다.)로 인해서 제한되었던 시각을 오늘 배철현 교수가 서양의 근원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서 이 시각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 인간 시대의 선진을 이끌어온 서양 문명에 대한 이해는 선문 문명을 이해하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님은 건축과 디자인을 가르키시지만 동양 철학에도 조예가 깊으시다. 어떻게 철학과 건축이 연결되는 것일까요?

김개천 교수 이야기:

인문, 예술, 과학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들도 함께 공부하였으며 조선의 지식인들도 문사철의 시서하에 의술과 무술까지 모두 통섭했다. 고로 전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사실 리더와 지식인의 필수적인 가치이다. 철학과 예술은 한 몸이라고 생각한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지난 시간에 배운 Passion은 자신에게 익숙치않은 낯선 곳으로 진입하는 마음의 상태이고, 그 속에 오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 다음 단계로 진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고 자신하는 순간 그 사람은 다시 혼돈으로 가게 된다. 이 Passion에 충분히 있다보면, 그 심연으로 들어가다 보면 생각이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을 Compassion이라고 말하고 싶다.

Com-:함께, Passion: 고통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길 수 있는 실력을 Compassion이라고 한다. 이는 슬픈 영화나 슬픈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기부하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일부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실력이다. Passion에 오래 머무르면 어떤이는 Passion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 독선과 자만으로 인해 영영 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심연에 오래 머무르며 깊게 들어가게 되면 나와 종교, 성적 성향, 정치적 견해 등 모든 것이 이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도자가 가질 가장 중요한 덕목인 Compassion이다. 자기의 Compassion의 반경이 자신의 가족에게 한정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다. 이를 자신의 주위로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독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마음을 한자로 자비(慈悲)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brahmavihāra라고 칭하며 깨달음이 주는 셀 수 없는 것들 즉, 무량(無量)의 네 가지 사상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첫 번째 가치이다. 불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무량수전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Maitre = 자(慈) = 사랑이다. 이는 산스그리뜨(인도어의 일종인 것 같음. 정확한 것은 모르겠으나 구글에서 Maitri를 검색하니 인도, 불교의 철학에 대해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추측합니다.)의 Maitri에서 유래되었다. 

지난 3,4화를 보면 현(玄)자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玄자는 검다라는 뜻도 있지만 가물가물하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자비의 慈는 이 현(玄)자가 두 개나 있다. 자비의 자(慈)는 가물가물한 마음을 뜻한다. 고로, 사랑이라는 것은 I Love You는 강압적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자(慈)는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는 마음이다. 비(悲)는 산스그리뜨어로 Karuna(까룬나)라고 하며, 이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나도 싫어하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양의 Compassion은 동양의 자비(慈悲)라고 하며, 모든 종교와 철학의 기저가 되는 생각이다.

자비가 만들어낸 문명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인류가 문명을 만들게 된 계기: 기원전 1만 2천년 전 빙하기가 끝났다. 인류는 동굴 밖으로 나와 녹은 땅에서 보리와 밀을 심으며 수확한 농산물로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인류가 최초로 정착 생활을 시작한 곳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3/Fertile_Crescent_map.png>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으로부터 시리아, 팔레스티나의 동지중해 해역을 거쳐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초승달 모양의 지대를 칭한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 지역(터키와 시리아의 중간부분)의 한 장소가 큰 주목을 끌고 있다. 이곳은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라는 고대 유적지가 1996년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곳의 탄소 연대를 측정해보니 기원전 1만 1천 50년전이였으며, 100m위의 언덕에 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기원 중 ’여리고’ 도시는 약 기원전 7천년 전이며,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기원전 5천년으로 치는데 1만 1천 50년전의 도시는 매우 의미깊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5/G%C3%B6bekli_Tepe,_Urfa.jpg/1280px-G%C3%B6bekli_Tepe,_Urfa.jpg>

괴베클리 테베에서는 동물의 뼈가 10만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이곳은 인류 최초의 신전으로 밝혀졌다. 신전이라는 것은 정착생활 후에 후대에 등장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괴베클리 테베는 영국의 스톤헨지보다 6천여정도 앞서있는 종교 시설이다. 이 괴베클리 테베의 등장때문에 기존에 있던 도시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지식이 도전 받았다. 기존에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이 도시를 컨트롤 하기 위해서 종교가 탄생되었다고 생각되었는데 이것이 아니라 종교가 먼저 만들어지고 도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이 대전환 되었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는 괴베클리 테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괴베클리 테베의 1만 1천 50년이라는 연대가 믿기 힘든 것이다. 배교수가 이야기했듯이 인류의 오래된 도시는 기원전 4~5천년경의 도시로 알려져있으며,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알려진 터키의 차탈 휘위크(Catal Huyuk)는 기원전 7~9천년전의 도시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차탈 휘위크에선 처음으로 신의 모습을 띤 신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 동안 인류는 샤머니즘이나 에니미즘을 제외한 구체적인 신의 등장 (인간의 삶을 설정하는 신의 모습을 띤 석상 같은)을 기원전 7천년으로 보았다. 때문에 인류의 삶에 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을 기원전 최대 1만년 전까지로 측정해왔다. 이는 빙하기의 기간이 기원전 1만 2천년 부터 1만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빙하기 이전에는 인류의 도시 문명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등장으로 어떻게 기원전 1만 1천년 전에 이런 문명이 있을 수 있는지 놀라운 것이였다.

괴테클리 테페는 아주 정교한 도시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기원전 5천 년, 그리고 그 이전에 발견된 도시 문명도 이토록 정교한 도시 체계를 갖춘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류 발전에 관련된 주류 학설은 농업(도시)이 먼저고 그 이후 신전(종교)가 생겼다는 것인데 다른 재밌는 학설은 농업(보리와 밀의 재배)은 술의 발효를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보리와 밀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됐는데, 이 술을 마시고 놀고 제사를 지낼 때 쓰기 위해서 농업을 한것이다. 라는 학설이다. 이러한 주류 학설(농업,도시-> 신전,종교)를 (신전,종교->농업,도시)로 바꿔놓은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의 문명사를 새로 쓰게한 사건이다.

김개천 교수는 배철현 교수에게 괴베클리 테페를 신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신전과 종교를 위해서 농업과 도시를 이루게 됐는지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신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곳에는 여러가지 조각상이 등장하는데 흔하지 않은 여우, 늑대, 전갈 조각상들이 정교하게 곳곳에 새겨져있다. 또한, 특별히 이곳에서 뼈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공동묘지였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동물뼈가 10만개 이상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곳은 종교제사의 제물로 쓸 동물 사육과 도축이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근거가 강하다.

현재 고고학계의 의견은 괴베클리 테페를 두고 ‘사회 공동체인 도시 건설 이후 농업이 등장했다’로 새롭게 책을 편찬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는 만약 10만개의 뼈가 발견된 것을 근거로 이곳이 신전이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곳이 무덤이라고 볼 수 있는 견해도 존재할 텐데 이에 대한 배철현 교수의 생각은 어떤지 묻는다. 또한, 그곳을 신전이라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증거, 예를 들면 신상이 발견되었는지 묻는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의 질문의 날카로움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신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여러가지 동물들만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한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이에 김개천 교수는 과거 괴베클리 테페의 고고학 사진을 보며 이곳이 신전이 아니라 공동묘지라는 생각을 했던 경험을 밝힌다. 그 근거는 괴베클리 테페의 모습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공동묘지(둥굴고 천장이 아주 높은 형태) 와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 김개천 교수는 괴베클리 테페가 공동묘지 였다는 주장을 약하게할 또다른 근거를 이야기한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공동묘지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이러한 시설이 무려 10개가 넘게 밀집되어 존재하며 그 당시 인간들의 거주지와 200km와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을 한 것들은 거주지 옆에서 발견되었다. 때문에 괴베클리 테페는 공동 묘지 혹은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관점이 존재한다. 이에 배철현 교수의 견해를 묻는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김개천 교수가 제시한 괴테클리 테페는 공동묘지인가? 신전?인가에 대해서 배철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괴테클리 테페는 거주지가 아니라 매우 의도적으로 만든 장소이다. 동물을 체계적으로 사육하는 장소였다. 지난 번 이야기한 동굴도 거주지가 아니라 동굴 속의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은 그 당시 인류가 섭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괴테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동물의 조각상들은 그곳에서 사육된 동물들을 그려넣은 것이었다. 때문에 괴테클리 테페는 신전이였다는 해설이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한편, 기원전 5천년경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는 수메르 문명이 태여난다. 이곳은 비옥한 침적토 지역으로 농업이 시작되었으며, 인류의 협동과 소통을 위한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도시 우루크(Uruk)에서 도시 문명과 문자의 기초를 발견한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우루크 토판 문서: 흙 판에 글자를 새긴 문서로 기원전 3200년의 유물이다. 현재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f/P1150884_Louvre_Uruk_III_tablette_%C3%A9criture_pr%C3%A9cun%C3%A9iforme_AO19936_rwk.jpg>

우루크 토판 문서는 진흙을 다져서 그 위에 갈대로 새겨넣었다. 쐐기 문자(성형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쐐기 문자는 형상을 흉내내면서 시작되었다.

우루크 토판 문서의 하단 가장 왼쪽 부분에 위치한 형상은 의자를 나타낸다. 이 의자는 ‘의자에 앉은 자’. 즉, 통치자 혹은 다스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단 중앙 부분은 ‘나무’의 형상을 나타내며 ‘위로 곧바로 자라나다’라는 뜻도 있다. 하단의 가장 오른쪽 형상은 ‘뿔’을 상징하며 이는 ‘위대함’, ‘크다’를 뜻한다.

문자는 일회성이 아닌 소통의 수단으로서 Uruk 도시의 문명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집트 나르메르 팔레트 (Narmer Palette)를 언급한다. 나르메르 팔레트는 1898년 상(上)이집트 히에라콘플리스에서 발견된 의식용 팔레트이다. 이 팔레트는 이집트 제 1왕조의 초대 파라오였던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기위해 제작된 최초의 부조 예술 조각품이다.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e/Narmer_Palette.jpg>

이 팔레트에는 곤봉을 든 통치자(나르메르)가 있으며 맨 위에는 황소 두개가 있다. 그리고 황소위에는 조그마한 집 형태의 문양이 있다. 이 조그마한 집 형태는 고대 이집트의 왕궁을 뜻한다. 옛 이집트에서는 이 왕궁에 자기의 이름을 쓰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버릇을 ‘카루투씨’라고 한다. 이 카루투시(나르메르의 이름)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 왕궁에는 ‘물고기(Nar)’ 형상 그리고 그 밑에는 망치와 정을 나타낼 때의 ’정(Mer)’을 썼다. 두 문자를 합치면 통치자 나르메르 (NarMer)가 되는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음가로 이름을 표기하는 체계인 것이다. 

이렇듯 의미가 아닌 그 문자가 가진 음을 활용해 이름을 표기하는 체계가 문자 역사의 가장 핵심인데 이집트는 이러한 문자를 기원전 3100년 전부터 사용했다. 

나르메르는 이집트 남쪽의 왕인데 파피루스가 많이 자라나는 북쪽 이집트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이 정복 과정을 나르메르 팔레트에 자세히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은 정복전쟁이 아니라 신을 위한 신성한 전쟁임을 나타내기 위해 곤봉을 든 통치자의 상징 왼쪽 부근을 보면 성수를 든 사람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팔레트의 다른 면에 새겨진 부분에 보면 정복자의 목을 모두 잘라 다리 사이에 끼고 전설 속 동물인 키메라를 당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나르메르 (이집트 제 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단순히 땅을 정복한 지상의 왕이 아니며 우주의 질서를 정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을 나타낸다.

그리고 양갈로 얽힌 키메라 밑에는 황소가 다른 도시를 쳐부시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집트 초기의 문자 작품을 새긴 이 나르메르 팔레트는 파라오의 눈화장을 위한 화장판이였다. 기원전 2600년이 되면 발전된 쐐기 문자가 발견된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6/Pictographs_Recording_the_Allocation_of_Beer_(London,_England).jpg>

이 토판의 하단 가장 왼쪽 부분은 사람 머리(SAG)와 먹는 빵(NINDA)가 합쳐져 있는데 사람 머리 + 빵을 혼합해 먹다(KU)라는 문자가 된다. 상단의 가장 왼쪽 부분은 수메르 언어로 ‘카쉬투가’로 말하는데, 옛날에는 임금을 맥주로 주었다고 한다. 이 상징은 맥주 한 Keg를 뜻한다. 이는 일하는 사람한테 주는 월급 명세서이다. 중간 부분의 가장 왼쪽 부분은 하늘의 별표시로 신을 상징했으며 하단의 가장 오른쪽 부분은 제단과 여자의 성기가 그려져있는 이는 ‘여신, 여자사제(NIN)’을 의미했다. 이러한 쐐기 문자가 고정되면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문학도 등장하였다.

김개천 교수 이야기:

소통하기 위해서 문자가 만들어졌다는 배철현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 소통이 신전에서 일어나느 종교 활동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사람과 사람간의 다양한 활동을 위해서 문자가 만들어진것인지 묻는다. 

즉, 어떤 소통을 위해 문자가 등장한 것인가?

배철현 교수 이야기:

위에 나온 쐐기문자 토판 문서들은 행정 관련 문서들이다. 때문에 인류 문명 초기의 문자는 행정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문자들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0.001%였을 것이다. 이 쐐기 문자들은 거대한 계급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 문자들은 세금과 무역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기원전 2-3천년 까지는 수메르언어가 공용어였는데, 그 당시 인도, 터키, 아르메니아, 이란까지 이 언어로 영수증을 끊어준 자료가 있다. 개인의 사유 재산이 등장하며 도장이 등장했다. 배교수는 그 예로 실린더 실(Cylinder Seal)을 언급한다. 

*실런더 실(Cylinder Seal): 고대 수메르인이 사용한 원통형의 방해석 인장으로 신화적 영웅, 야수와 싸우는 그림, 이름 등을 새겨넣어 사용했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5/Cylinder_seal_cowshed_Louvre_Klq17.jpg>

또한,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우르(Ur)도시의 조각상을 보여준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Standard_of_Ur_-_War.jpg> 전쟁의 시대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f/Standard_of_Ur_-_peace_side.jpg> 평화의 시대

이 조각상의 한쪽은 평화의 시대(위), 다른 한쪽은 전쟁의 시대(아래)를 표현했다. 이 조각에는 수례가 그려져있는데 이미 그 당시에 수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조각은 전체가 파란색 돌로 제작되었는데 이 돌은 오직 파키스탄에서만 나온다. 또 빨간 돌은 북쪽지역에서만 나온다. 즉 우르(Ur)라는 도시의 상징물을 만들기위해 파키스탄에서 저 돌들을 무역을 통해 들여와서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밑에 평화의 시대를 보면 계급화된 인간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하프가 새겨져 있었는데, Ur의 푸압이라는 여왕의 무덤에서 하프가 26개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노래하는 가수의 모습도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서 이미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작농들은 할당된 세금(농작물)을 납부하지 못하면 노예가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도 새겨져 있다.

이 때, 무형의 새로운 문학 형태가 등장하였다. 바로 구전으로 등장한 최초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길가메시는 실제로 기원전 2600년전 인류 최초의 도시라고 칭할 수 있는 ‘우루크’의 왕이었다. 이 영웅적인 길가메시의 신화는 구전으로 이어져오면서 재생산되었고, 우루크 제 3왕조의 수룩 왕이 길가메시를 신격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19세기에 구전으로 떠도는 민담과 속담을 모아 하나의 신화로 탄생되었는데 그 신화가 바로 12편으로 이루어진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15세기 신넷껫 우닌(?)이라는 사람이 만든 신화이다.<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a/British_Museum_Flood_Tablet.jpg>

길가메시(GilgaMesh)는 Gilga(노인) + Mesh(청년)의 문자가 합성된 것이며, ‘노인이 청년이 되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김재천 교수 이야기:

구전으로 전해진 동양철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양의 ‘주역’도 기원전 2500년경 구전으로 전달되기 시작해서 약 1천년간의 민담을 모아서 작성되었다. => 인류 문명 대부분의 시초는 기원전 3천 년이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1900년에 발견된 토판 문서, 기원전 1400년 문서(신넷껫 우넨이 쓴) 토판 문서가 발견되었다. 기원전 14세기에 길가메시 서사시의 정형화가 이뤄진다. 그렇다면 기원전 14세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로 아르메니아, 이집트, 터키 등 각종 지역의 공용문자가 아카드어(쐐기문자) 였다. 국제 공용어로서 아카드어가 쓰였고 모두가 이를 배웠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가 이집트, 이스라엘, 아프간 등 곳곳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아카드어를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괴테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세계 문학의 전형(Belt liter tour)으로 이야기했다.

옛날의 책들은 그 책의 첫 번째 문장이 곧 제목이였으므로, 첫 문장이 매우 중요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맨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신넷껫 우닌은 깊은 고민 후에  ‘나라의 기초인 심연을 본 사람’ (Sha naqba imuru ishdi mati)을 썼다.

naqba는 심연이라는 뜻이며, 실제로 길가메시는 영생을 위해 바다의 밑으로 잠수해 불로초를 목격했다. 이 심연(naqba)은 바다의 심연을 뜻하기도 했지만 ‘동서고금의 지식의 총체’를 뜻하기도 했다. 즉, 길가메시 서사시는 자신의 심연을 여행한 이야기이며 동서고금의 모든 것의 경험을 담은 것이다. 고로, 길가메시는 지혜에 대한 찬양 시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가메시는 반신반인으로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다. 신들은 길가메시의 위세를 꺾기위해 반인반신의 괴물 엔키두를 보냈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오히려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아주 친한 친구(길가메시의 제2의 자아)가 되어버린다. 엔키두는 도시인 Uruk에서 생활하며 짐승의 본성이 없어지자 신에게 대항하고자 길가메시와 함께 백향목을 베어버리고 이를 지키던  후와와도 죽인다. 길가메시에게 반한 이슈타르 여신은 그에게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하자 괴물을 내려보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이 괴물에 승리한다. 하지만 신의 동물을 죽였다는 이유때문에 엔키두(길가메시의 제2의 자아)는 죽게된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엔키두가 죽었다는 것은 길가메시의 반쪽이 죽은 것을 뜻한다. 엔키두의 죽음이전에 길가메시는 영웅적인 서사시가 이야기하는 명성만을 쫓다가 엔키두의 죽음, 자신의 반쪽이 죽음을 겪으며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에 길가메시는 영생을 알기 위해 지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길가메시는 지하의 경계에 사는 ‘신두리’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매우 깜짝 놀란다. 그 유명한 Uruk의 왕인 길가메시가 거지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길가메시는 그녀에게 ‘나는 지하에 사는 홍수에서 살아나는 우타나피쉬팀을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그러자 신두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길가메쉬여, 당신의 배를 가득 채우세요. 밤낮으로 즐겁게 지내세요. 하루 하루를 즐거운 축제일로 만드세요. 밤낮으로 춤추고 노세요. 당신의 의상을 정결하고 눈부시게 만드세요. 당신의 머리를 감고 목욕하세요. 당신의 손에 안고 있는 어린 아이를 주목하세요.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만드세요. ” 

신두리는 이 이야기를 길가메시에게 하며 이것이 인간이 해야할 일이며 영생을 찾지말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전도서에도 등장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가 말한 Carpe Diem을 연상시킨다. 호라티우스는 Horace라고도 불리운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5/Quintus_Horatius_Flaccus.jpg>

Carpe = 잡다. Diem = day

호라티우스(Horatius)는 송가(The Odes)의 1권 11행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고 미래 일어날 일을 최소한으로 믿어라.”

즉, 신두리는 길가메시에게 미래에 대한 집착보다 현재에 집중하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이에 불응하고 지하 세계로의 영생을 계속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어서… 

결국 길가메시는 지하 세계에서 영생을 산다는 우타나피쉬팀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영생의 방법은 모른다며 대신 길가메시에게 불로초를 얻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길가메시는 심연(naqba)에 들어가서 불로초를 따온다. 그러나 불로초를 따고 지구로 돌아오면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뱀이 그가 따온 불로초를 먹어버리게 된다. 결국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심연의 여행을 통해서 길가메시는 ‘동서고금의 모든 것의 경험’ 즉,지혜를 얻게 된다.

배철현 교수 이야기:

신넷껫 우닌은 이 길가메시 서사시의 1판의 9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urha ruqta illikam-ma anih u šupšuh

그는 먼 길을 떠나 지쳤지만, 새 힘을 얻었다.

영웅으로 거듭나는 단계는 총 3단계이다. 그리고 이 단계는 이후 등장하는 모든 영웅의 서사시와 내용의 핵심으로 자리잡는다.

첫 단계는 먼 길을 떠나는 것, 두 번째는 위기를 통해 죽을 경험도 하였지만 새 힘을 얻는 것, 세 번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영웅으로 변모하는 것(통합의 단계)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아놀드 반 즈네프는 이러한 영웅의 통과의례를 다룬 ‘통과의례’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장소, 상태, 사회적 지위, 연력 등의 변화에 따른 의례를 가리키며 1909년에 처음으로 ‘통과의례’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아놀드 반 즈네프는 인간이 영웅으로 변화는 여러가지 통과 의례중 위기를 통해서 지쳤지만 이를 이겨내고 새로운 힘을 얻는 두 번째 단계를 경계의 단계(Liminal Stage)라고 표현하였다.

배교수는 단테의 <신곡>의 서두 부문을 언급한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e/Sandro_Botticelli_-_La_Carte_de_l'Enfer.jpg>

단테 <신곡(Inferno)> Canto I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우리 인생의, 삶의 여정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두운 숲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어두운 숲은 내 인생의 올바른 길이 숨겨진 장소이다. 

어두운 숲속은 바로 경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신곡의 주인공은 연옥과 지옥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이 어두운 숲속, 알지 못하는 길에 들어서면서 시작하게 된다. 이는 곧 그가 영웅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배철현 교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은 무지의 세계에 들어설 때 스스로가 충분히 들어가도록 노력할 때 열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영웅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번 시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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