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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ing/보고 남김

EBS 통찰 04: 동굴과 열정 그리고 자기 성찰 (2)

by 그냥그렇듯이 201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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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

배철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

신수진 (연세대학교 인지과학 연구소 연구 교수)

배철현 교수 이야기:

지난 시간에 이어서 동굴의 상징성에 대해서 다룬것이다.

‘동굴’은 일상과 구별된 공간을 나타내며, 일상과 구별된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경계’에 서 있어야한다.경계는 라틴어 Limen에서 파생되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그곳이 경계다. 

영어의 창의성(Liminality)은 이 경계에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를 굳이 한자에서 찾다면 ‘현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현관(玄關)의 현(玄)자는 검을 현이 아니라 가물 현이다. 가물가물하다 할때의 ‘현’자이다. 불교사상에서 극락과 현세의 사이의 공간을 ‘현관(玄關)’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경계는 강, 동굴, 사막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이 경계에 내가 어떻게 서 있으며 이 경계를 어떻게 나의 삶의 일부로 만드냐에 따라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게 된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 슈네페르라는 고관이 있었다. 이 사람은 사후 세계를 그린 작품을 남겼다.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필히 답해야할 핵심 질문이 있는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은 당신의 마아트(Maat)를 알았습니까?” 

이는 “당신은 살면서 반드시 해야할 생각과 행동을 다 했습니까?”를묻는 질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과 성찰의 시작인 것이다. 

나한테 유일하고 내가 꼭 해야할 일을 모르는 것은 중대한 개인의 하자이다. 오만을 통해서 영웅들이 가지는 하자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한다. 하마르티아는 과오, 약점, 비극적 결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이를 ‘죄’라고 번역했다. 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는 바로 자기가 할 일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성찰의 끝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 그곳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 나한테 유일한 세계에 All-in할 때 내게 쌓아지는 것이 바로 천재성이다.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따라하는 것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나온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한국 사회는 남들이 한 대답에 익숙한 측면이 있다. 새로운 장르의 질문을 할 수 있는가? 이가 창의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관련되어서 그리스의 비극 문화인 Oedipus를 언급한다.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오늘날의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최고의 비극 문학작품인 오이디푸스 왕(Oedipus the King)을 썼다. 오이디푸스는 어렸을 때부터 저주를 받으며 아버지 라이오스와 어머니 요카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라이오스는 점을 봤는데 아들이 태어날거면 이 아들이 자기를 살해할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라이오스는 오디피우스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다리를 꽁꽁 묶인채 버림 당했다. Oedi는 퉁퉁부은 이라는 뜻이고 pus는 다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목동이 오이디푸스를 발견하고 키운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고린도의 왕에게 왕자가 없어서 그쪽으로 입양이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연스럽게 왕자가 되었고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알게된다.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점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그는 여행을 떠난다. 이 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가 있는 테베로 가는 경계에서 스핑크스를 만난다. 스핑크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키는 신이다. 그 당시 그곳에는 엄청난 역병이 돌고 있었으며 테베로 들어가려는 오이디푸스에게 스핑크스는 질문을 준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 이후 만나게 되는 괴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내가 만난 ‘나’를 99%의 인간은 부정한다. 하지만 1%의 사람들은 이 자아를 자신에게 끌어들인다. 천재들이 경계에서 계속하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이다.

다시 라스코 동굴로 이야기의 중심이 옮겨간다.

라스코 동굴 미로의 끝에 그려진 벽화 중 하나가 매우 눈길을 끈다. 이 벽화에는 사냥당한 맘모스와 소떼 그리고 누워있는 인간이 그려져 있다. 구석기 벽화에는 보통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인간을 그려넣은 심리는 무엇일까?

이에 신교수는 종교와 예술이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자기 존재를 다른 존재와 연결시키는 힘이 아주 제한되어있는 인간의 신체와 삶의 시간 그리고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배교수가 이야기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함으로써 경계를 넘어서는 것과 관계되어있을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벽화에 그려져있는 동물들은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확장시키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존재 확장’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배교수는 칼랄의 원주민들이 사냥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칼랄의 원주민들은 사냥을 할 때 사냥물을 3일정도 계속 쫓아다닌다. 그리고 독화살로 사냥할 동물을 서서히 죽인다. 이 때, 동물들은 10시간정도 서서히 독이 퍼지면서 큰 울음 소리로 우는데 칼라의 원주민들은 이 때 서서히 죽어가는 동물의 손을 잡고 그들과 같이 운다. 이것은 포식자와 피식자가 아니고 이 우주 속에서 너와 나를 하나의 개체로 인식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Oneness와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금 벽화의 구성 요소 중 누워있는 인간으로 주목한다. 이러한 인간의 그림은 북미의 바위 그림, 중국의 그림에 아주 동일하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인간은 다리가 꼬여있다. => 이는 다른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술마시면 휘청되는 것처럼. 또한 이 이간은 성기가 서있다. 죽어있지만 부활했다는 것이다. 또한, 팔의 길이가 서로 다른데 이는 자기의 보통 상태가 아니라 abnormal한 상태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머리 부분은 항상 가면을 쓰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새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에 신교수는 심리학에서의 Persona(가면)를 이야기한다. Persona는 그리스어로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학을 수행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배교수는 Persona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Prosopon’은 목소리를 통한 어떤 것이라는 뜻인데 Prosopon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목소리라는 Persona라는 가면을 쓰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속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옛날 사제들의 제사 장면을 추가적으로 조사했다. 신전에 항상 있는 것은 제단이다. 제단은 ‘일상과 떨어져 아무나 올라갈 수 없는 금기의 공간’이다. 제단을 넘기위해서는 반드시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한다. 성당을 들어가기 전에 성수를 찍는 것, 그리고 모스크에 들어갈 때 손발을 씻는것도 이러한 과정이다. 그리고 사제들은 새를 보고 점을 쳤다. Augury(새로 점치기), Auspicious(상서로운)는 여기서 기인했다. 중국에서는 이를 길조(吉鳥)라고 칭했다. 이러한 공간에서 중세의 그리스도인은 Con-Templatio를 이야기했다.

 Con-: -와 함께, Templum: 신전, 거룩한 장소 

바로 제단에서 하늘에 있는 독수리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야하는 길위에 서있는 내가 지금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저 하늘위에 떠있는 독수리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한자로 기도(祈禱)라고 했다. 한국에는 일본을 통해서 이 단어가 유입되었다. 배 교수는 개인적으로 한자어의 기도를 선호하지 않는다. 왜나면 기도라는 한자어가 보일 시에 도끼 도, 보일 시에 목숨 수 자를 쓰는데 이는 한 손엔 자신의 심장을 쥐고 다른 손엔 도끼를 쥔채로 신에게 내 기도를 안들어주면 죽겠다고 협박하는 모양새라서 그렇단다.

진정한 기도는 Con-Templatio이다. 이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가고 있는지 독수리의 눈으로 관망하는 연습이다. 이를 그리스어로 Theoria라고 한다. Theory: 피타과스가 인간의 영혼이 모든 편견을 없앤 순수한 상태에서 대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 정신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 이 Theoria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엘리야(Eliyah)가 발견하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국 초기의 예언자이며 바알 숭배를 공격하여 여호와의 유일함을 선언했으며 유대인에게 구세주 재림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엘리야가 존재한 당시 북이스라엘이 너무나도 타락했다. 아합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 물질적인 신 ‘바알’을 숭배하였다. 엘리야는 이에 ‘바알’의 예언자 950명을 처형하게 된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으며, 엘리야는 이를 피해 사막으로 40일동안 도망친다. 그리고 엘리야는 동굴안으로 들어간다. 엘리야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그리고 엘리야는 마음의 소리속에서 ‘네가 니 앞으로 지나갈테니 동굴 밖에 서있으라’는 신의 응답을 듣는다. 그래서 엘리야가 동굴밖에 서있자, 엄청난 폭풍우가 지나가고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곳에 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 작고 섬세한 침묵의 소리가 들렸다. 이를 히브리 어로 '콜 더마마 닥까 (Qol demamah daqqa)'라고 한다.

Qol: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 demamah: 침묵

이 침묵의 소리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배교수는 이가 종교사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면, 신이 장소나 시간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거주하기 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아라비아의 예언자이자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무함마드는 575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가 5살에 죽고 아버지는 태어나기도전에 죽었다. 무함마드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랬더니 메카의 최고 부자인 카-디자가 무함마드를 보고 청혼을 한다. 카-디자는 무함마드보다 15살 많았다. 무함마드는 고아였다가 메카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자신의 존재를 알기위해서 메카의 외곽에 있는 ‘히라’ 동굴에 가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히라’ 동굴에서 자신의 마음속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꾸란은 114장으로 되어있는데 96장에 바로 첫번째 계시의 내용이 나온다.

꾸란 96장 1절: iqra bismi r-rabbika lladi halaqa: 우주를 창조한 너의 주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리고 이 계시를 읽은 것이 Quran이다. 

*Quran은 이슬람교의 경전으로 무함마드가 610년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처음으로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632년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다. Quran은 ‘낭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핸리 데이비스 소로(Henry David Thoreau)은 1845년부터 1847년까지 사회와 인연을 끊고 윌든의 숲 속에서 살면서 홀로 청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며 자연과 인생을 직시했다. 그리고 ‘윌든’이라는 수필집을 남겼다. 핸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 책을 통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장소가 가장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바로 Solitude이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1523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착공하여 1571년에 완성하였다. 이 도서관의 구조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안에 있는 ‘가짜문’ 아이디어가 적용된 곳이 있다. 또한, 이 ‘가짜문’은 마크 로스코라는 예술가의 ‘로스코 채플’이라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소는 순간을 느끼고 자신을 성찰하는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Steve Jobs는 심각하게 골방에서 자신의 인생을 갈고닦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2006년 스탠포드 졸업 연설 부문 중 배교수가 특별히 주목한 곳이 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I found it fascinating.’

배교수는 이는 Steve Jobs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font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통찰을 발휘한 것이며 가히 그 수준이 소크라테스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창조’라는 단어는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창조’를 히브리어로 보면 Bara이다. 이 Bara는 ‘잘라내는 것’을 뜻한다. 자기에게 유일하고 최소하게 남은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쇼베 동굴에 벽화들 중 손바닥이 찍혀있는 벽화들이 있다. 이 손바닥의 주인은 동굴 내부 곳곳에 벽화를 남기고 꼭 자기의 손바닥을 찍었다. 이는 처음으로 ‘자아 의식’이 발아된 것이다.

(이 사진은 산타크루즈, 스페인의 동굴에서 나온 사진이다. 쇼베 동굴에서 찍은 사진은 찾을 수 없기에 대신 쓴다.)

배교수는 창의적인 단계로 가기위해선 의도적인 고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신교수는 예술가와 일반인들의 차이점을 질문의 방향같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인들은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해 주는 것에 익숙하며, 예술가들은 혹은 적어도 동굴속에 들어가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묵상과 동굴이 필요하다.

배교수는 이에 대해 무슬림들의 하루 5번의 기도 습관을 이야기하며, 이는 ‘끼불라’라고 하며 자신의 자아를 기도로 꺾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라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함석헌 시인의 ‘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를 낭독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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